[책] 레드 드래곤, 양들의 침묵, 한니발

양들의 침묵. 이유는 모르지만, 늘상 심심하면 읽는 책 중 하나다. (셜록 홈즈, 오딧세이아, 마술팬티..) 그래서 얼마 전에 읽다가 찾아낸 대목이 있다. 그 대목을 읽고 처음으로 ‘스탈링과 렉터가 괜찮은 한 쌍(?)이 될 수도 있었군..’ 했다.

“그런데 이번엔 라스페일 자신이 죽었어요. 왜?”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라스페일이 징징거리는 게 아주 싫었소. 질색이었지. 라스페일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게다가 치료도 제대로 안 되더군. 내가 알기로 정신분석의사들에게는 나에게 제대로 보이고 싶은 환자가 한둘쯤은 있소. 이런 말은 아직 한 번도 한 적이 없소만 하다보니까 그것도 심드렁하군.”

“그래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대접하고 말았군요.”

“손님은 들이닥치고, 시장 갈 시간은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 냉장고에 있는 걸로 그럭저럭 때워야지. 안 그래, 클라리스? 클라리스라고 불러도 되지?”

“좋아요, 그럼 나도…”

“안 돼. 당신은 제대로 불러. 당신 나이와 직위에 맞는 호칭이니까.”

– p76. 고려원. 이윤기 역 “양들의 침묵”

… 사실 난 토마스 해리스의 프로페셔널 정신은 좋아하지만 작가정신은 싫어한다. 해리스는 자기가 만든 인물에 애정이 없다. ‘한니발’에서 제일 화가 났던 것은 스탈링과 렉터 때문이 아니라, 잭 크로포드와 아델리아 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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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조연을 좋아한다. 홈즈보다 왓슨을 좋아하고, 멀더와 스컬리만큼(히히) 도겟과 레이어스를 좋아하고, 스키너를 좋아하고, 크라이첵을 사랑했으며, 펜드렐을 아끼고, 목소리와 엑스를 존경했다. (마리타는?!;;) 하다못해 스펜더도 아까와했으며, 폴머도 아쉬워하고, 해리슨은 너무나 귀여워한다.

토마스 해리스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레드 드래곤 – 양들의 침묵 – 한니발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일단 토마스 해리스의 엄청난 필력이었다. 양들의 침묵을 먼저 읽고 레드 드래곤을 봤는데, 이렇게 ‘속편'(?)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실망이 든 것은 윌 그레이엄이었다. 윌 그레이엄은 양들의 침묵에서 두 번 언급된다. 한 번은 잭 크로포드가, 한 번은 한니발 렉터가.

한니발 렉터는 윌 그레이엄을 두고 ‘잭 크로포드의 똘마니’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렉터 입장에서는 실력도 한 수 낮은 것이 감히 자기를 잡아넣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레이엄에게 복수도 하고 싶었을 것이고(했다), 성에 안 찬다는 점에서 계속 무시할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잭 크로포드였다. 잭 크로포드가 윌 그레이엄을 다시 레드 드래곤 사건으로 불러들인 이상, 그레이엄 이야기를 스탈링한테 하는 장면은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레드 드래곤 알지? (중략) 그래서 그레이엄의 얼굴은 피카소에 나오는 그림같이 되었잖아.’ 결국 그 꼬락서니를 자기가 자초했다는 것을 알면, 그런 얘기가 나오면 안되는 것이다. 만일 잭 크로포드가 냉혈한일 수도 있지..라고 한다면 양들의 침묵 이야기하고도 안 맞는다. 크로포드는 자기 마누라가 다 죽어가는 판국에 자기 부하도 아닌 연수생 스탈링을 감싸느라고 법무부 직원과 싸움도 불사하는 사람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크로포드가 후반부에 아내 벨라 장례식을 치른 직후, 스탈링에게 현금을 몽땅 털어 수사를 다녀오라고 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찡하다. 죽도록 사랑한 사람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머리가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해리스가 이미 떠난 주인공 윌 그레이엄을 버린 것이었다. 잭 크로포드의 모델은 ‘마음의 사냥꾼’ 주인공인 존 더글라스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배우는 살만 좀 빠진 거 빼고는 존 더글라스와 정말 이미지가 비슷하다. 사실 배우가 존 더글라스와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했다고 하다. 내 머리속의 잭 크로포드는 기실 존 더글라스였다. 그 점을 감안할 때, 바로 전편에서 자기가 끌여들어 인생 도로 종친 ‘친구’ 이야기를 하며 그런 무덤덤한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한니발로 넘어오자, 이번엔 잭 크로포드가 그 쪽박 신세가 되었다. 한니발에서 잭 크로포드는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등장한다. 심지어 심장마비도 덜컥 걸려버린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후줄근해질 수는 있지만, 잭 크로포드 정도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이빨빠진 호랑이도 아니라 이빨빠진 여우가 된다고 믿지 않는다. 타락을 할 수 있지만, 호랑이가 여우가 되는 일은 없다. 잭 크로포드가 그 세월에 그렇게 말라가는데 그럼 도대체 렉터는 뭐란 말인가?

양들의 침묵에서 실제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잭 크로포드와 한니발 렉터이다. 둘은 스탈링을 매개체로 해서 밀고 당기기를 한다. 렉터가 갑자기 후반부에 범인을 잡도록 도와준 것은 단지 스탈링에 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잭 크로포드의 아내 벨라가 위독하다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렉터는 크로포드의 똘마니 그레이엄은 죽도록 싫어하지만, 크로포드한테는 적수로서의 인정을 한다. 그것을 이미 파악한 크로포드, 렉터가 도망쳤다는데 자기 집에 경비 한 사람 부르지도 않는다. 정말 애인보다 더 잘 아는 사이가 아닌가?

그런 판국에 한니발에서 크로포드가 그리 나오니… 죽고 싶었다. 영화 한니발에서 딱 하나만은 칭찬한다. 그런 크로포드는 아예 이야기에서 제외하는 게 좋다.

아, 이게 생각났다. 나는 한니발을 읽고/보고 나서 확실히 알았는데, 한니발의 등장인물은 스탈링이 아니어야 했다. 윌 그레이엄이어야 했다. 렉터는 스탈링이라는 좋은 장난감이 해를 입는 것에 찔려한다면, 그레이엄이라는 장난감이 또다시 해를 입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이 등장이라도 해야 했다!

소설 한니발을 읽고서 감탄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와, 쓰기 싫은 걸 이 정도로 잘 쓰다니! 천재 맞나봐!’

한니발은 앞 이야기 두 편에서 존재감은 강하지만 주연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주연이 되면 보통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스핀오프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조연일 때는 부각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과거문제가 잠깐만 등장하거나 아주 약간만 나와서 미스테리함을 증폭시킨다. 상상의 여지를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 된다. 하지만 주연이 되면 갑자기 과거사가 전면에 오르면서 그 환상이 우수수 무너지게 되어있다.

한니발의 과거는… 솔직히 그거 가지고 사람 잡아먹게 되었다는 것은 억지일 뿐더러, 그리고 한니발한테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소설에서도 그런 고로 그 부분은 아주 조금만 묘사하고 지나간다. 고마운 일이다.

스핀오프의 나쁜 점 중 하나가 – 주인공의 과거사에 대해서 이전에 언급이 없던 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일이 발생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스핀오프 시리즈 ‘앤젤’을 좋아하는 것은 그런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다 이미 ‘버피’ 시리즈에서 언급이 되었던 일이 스핀오프 시리즈에서 전면부각되기에 뜬금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니발도 바로 그 절차를 겪는다. 바로 한니발을 씹어 먹고(?) 싶어하는 변태 대부호 메이슨 버저이다. 어디서 이 양반이 나와야할지 원, 보기드문 변태놈으로서는 괜찮지만, 시리즈상으로는 너무 뜬금없다.

이전의 레드 드래곤의 달라라이드나 양들의 침묵의 버팔로 빌은 본래 렉터와 연관이 없거나, 아니면 크게 관련이 없는 상태에서 캐릭터가 출발한다. 메이슨 버저는 한니발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상에서는 억지로 지어냈다는 인상이 너무도 강하다. 그리고 버저 덕분에 이야기가 두 개로 갈라지는 것도 이야기 산만함에 역할이 크다. 이탈리아 부분과 미국 부분. 너무 동떨어진다. 물론 이탈리아 부분의 파찌형사가 너무 인상적인 게 아깝기는 하지만.

바로 메이슨 버저 때문에, 크로포드가 망가진 것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크로포드와 렉터의 미묘한 대결이 있었지만 한니발에서는 버저와 렉터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필요없는 크로포드는 나가주셔야 했다. 그런데 그 퇴장이 너무나 엉망이었으니. 차라리 괜히 앞에 나와서 비명횡사한 브라이엄이 나았을까?

한니발을 쓰면서 토마스 해리스가 게을러졌다는 증거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캐릭터가 도로 우르르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앞에 나왔다가 불쌍하게 죽는 브라이엄은 양들의 침묵에서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시종일관 내내 ‘한국에서 배운 실력으로’ 연수생들을 괴롭히는 악덕 교관이지만 실제 개개인 앞에서는 ‘하느님의 가호를 비는’ 순진한 사람이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브라이엄은 큰 역할이 없어도 인상적인 FBI 요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한니발에서 브라이엄이 스탈링에게 사귀자고 했다가 퇴짜맞았다는 언급이 나오고, 브라이엄이 자기 유품을 스탈링에게 물려주는데 – 솔직히 짜증이 났다. 아니 남자들은 인간적으로 공감한 사람한테는 다 홀라당 발라당 ‘평생’ 반하나? 이전의 그 수둡한 ‘하나님의 가호’가 좋았다. 안 그래도 한니발 렉터의 과도한 애정표현이 닭살이나 죽을 판국에… 스탈링한테는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건지, 브라이엄에, 크로포드에, 렉터에, 하다못해 잭 크렌들러까지… 뷁.

잭 크렌들러는 양들의 침묵에서도 얄밉게 나온다. 그리고 한니발에서는 더 악독하게 나온다. 나로서는 그것이 게으르게 보였다. 그 사건 하나 뺏겼다고 두고두고 스탈링을 잡아 먹으려 한다… 라.

여기서 해리스의 본질이 나와버린 것이다. 쓰기는 해야 할테니. 스탈링이 반짝반짝 신참에서 후줄근 지쳐버린 요원이 되는 그 7년 정도의 시간 사이에, 다른 사람들만은 하나도 성격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라?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양들의 침묵에서 특별히 인종언급이 없던 아델리아 맵이 한니발에서 갑자기 유색인이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 부터 영화 성공이후의 압박이 보이는 것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아델리아 맵은 흑인으로 등장한다) 가장 최고의 코메디는 물론 스탈링 얼굴의 화약자국이다. ‘수업시간 10분 전에도 바지를 너끈히 다려입고 나가는’ 여자는 절대 그런 자국을 자기 얼굴에 남기지 않는다.

크렌들러가 좀 흥미있는 이야기 진행을 보일 뻔 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각색에 뭐라고 하는 편이다. 분명히 스탈링은 복수심을 쾌락으로 이해하며 크렌들러의 두개골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나는 수많은 여자 캐릭터들이 복수를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것 조차 거부하는 상황에 질려있던 터라, 사실 이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스탈링이 약에 취해서 사람을 먹은 것이 아니라, 약 덕분에 조금 과감해졌을 뿐, 사실 스탈링은 크렌들러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해 온 ‘먹고싶다’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쁘게. 그 것 하나만은 정말 좋았다. 그래서 영화 한니발에서 그 장면을 그냥 엽기로 처리한 것은 참으로 ‘찌질’해보인다. 아마도 내가 각색을 했다면 나는 스탈링이 잠옷을 입은 채로 소박한 별장에서 크렌들러의 뇌를 먹어치우게 했을 것이다. 다만 약에 취해서 자신은 훌륭한 옷을 입고 대궐같은 곳에서 먹었다고 느끼게 해 줬을 것이다. 그랬더니 영화는… 우웩. 그 옷을 예쁘다고 입힌 렉터는 변태였다. 그리고 눈도 잘 안보이고 헤롱헤롱한 상태에서 그 발목킬러 하이힐을 끝까지 신고 그 계단을 내려간 스탈링은 신발변태다.

사실 스탈링이나 렉터의 변화는 모든 스핀오프 시리즈의 이상징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둘이 잘먹고 잘 산다더라는 결말은 더 이상의 스핀오프를 만들기 싫은 작가의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점까지는 인정한다. 이미 스탈링 자체가 FBI에 마음이 떠났다고 나오는 판국에 뭘 더 어쩌란 말인가. 스컬리가 FBI에 마음이 떠나서 멀더 버리고 담배맨이랑 도망가면 잘 먹고 잘 살겠지, 뭘 더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스컬리가.. 아니 스탈링이 그렇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옆의 멀더나 스키너가.. 아니 크로포드와 맵이 그렇게 이상해져야 할 이유가 없다. 연수생부터 같이 커온 아델리아 맵이 비싸고 예쁜(스탈링+렉터의 미감이면 분명히 무지무지하게 아름다운 반지세팅을 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반지와 쪽지 하나에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니발 앞에서 나온 이빨빠진 여우 장면들 때문에, 크로포드가 또다시 심장마비가 오자 아내 벨라의 자리로 굴러가 죽음을 택한다는 설정은… 신파를 넘어 코메디가 되었다. 아, 정말 그 순간 내가 왜 이걸 읽었나 후회를 했던 것이다. 스핀오프라는 구조적 속성상 주인공이 이상해지고 망가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조와 별다른 상관없는 죄없는 조연을 망가뜨리는 것은… 그건 작가의 애정문제인 것이다. 사랑하면 그렇게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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