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제목을 기억해 주세요

근래 위성방송에서 하는 일종의 주문 비디오 서비스(VOD) 광고를 보다가 나는 의아해졌다. 화면상으로는 분명히 아는 영화인데 제목이 영 엉뚱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위성 VOD에서 수입한 제목과 전혀 다른 제목을 붙여서 방송을 한 것이었다. 그 영화의 수입 및 비디오 제목은 <40 데이즈 40 나이트>. 내가 VOD 광고에서 본 제목은 <섹스 참기 40일 작전>. 심각했다. <자니 잉글리쉬>는 <미스터 빈의 첩보대작전>, <케이트와 레오폴드>는 <맥 라이언의 타임머신 타고 온 사랑>. 이쯤 되면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으로서 살의가 느껴진다. <미래전사, 이퀼리브리엄>이나 <은장도 : 열려라 열녀문>은 양반이었다.

제목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이 영화와 저 영화가 같다는 것을 아는 차원이 아니다. 영화의 제목은 사람의 이름과 같다. 이미지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이다. 또한 작품 제목은 일종의 정보이다. 위성 VOD에서 제목을 아무렇게나 바꾸는 것은 우리나라 개봉목록을 만드는 정보수집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 어느 영화가 어느 제목으로 처음 들어왔는가를 기록하는 것은 세관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정리하고 목록화하는 것과 같다.

작품 데이터 베이스 구축은 지금 당장에는 의미가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 속속들이 생겨나는 고전영화 채널 등을 보면 과거의 데이터 베이스가 왜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어느 영화가 언제 어느 제목으로 수입되어 언제 재개봉되었고, 처음 TV 방송을 탄 것 등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느 시기에는 그 사실이 역사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위성 VOD의 ‘창씨개명’ 문제가 단순치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현재 위성 VOD가 저지르는 행위는 방송사로서 책임회피이다. 극장 미개봉작 경우도 최신작 위주로 선별하기 때문에 속편 경우 전편의 제목이 어땠는가, 현재 비디오 수입제목이 어떻게 되는가 등의 확인작업이 가능하다. 오직 관객동원수치가 낮았다는 자의적인 판단만으로 자사의 이익만을 추구한 행위이기에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회사이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자와 타 회사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 위성방송의 홈페이지를 가봐도 과거 방영 영화의 목록은 없기에 제목을 바꾼 영화를 본 시청자는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게 된다. 이것은 시청자에게 혼란일 뿐만 아니라, 영화시장에도 혼란을 안겨준다.

위성 VOD 방송국은 아무리 수입제목이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고 해도 제목을 고칠 권리가 없다. 가입자가 몇 만 명을 넘었건, 실수입이 얼마가 되건, 방송국은 시청자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그에 맞춰 방송물 수준을 하향조정할 권리를 부여받지 않는다. 최신작에 실감나는 5.1 사운드를 방송해보았자, 작품 하향조정의 마인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았을 때 방송국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다.

2004/02/19
메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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