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엔] 오만한 자의 오만한 세계 “도그빌”

영화 <도그빌>은 늘상 일벌이고 말썽부리기로 작정한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답게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시작해서 기가 막힌 억지로 끝을 맺는다. <도그빌>이 무슨 새로운 영상기법이나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는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도그빌>에 나오는 ‘심플한 세트’ 장면은 단지 연극을 영상으로 옮긴 것뿐이기 때문이다. 문화 채널 등에서 연극을 영상화한 작품을 찾아보면 <도그빌>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잘 만들고 감성적으로 감동적인 작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상영시간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도 그 설정에 신선함을 느끼지 않는다. 상영시간 세 시간 동안 관객은 지루한 학대 중계를 봐야만 한다.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개목걸이’도 결국 연극적인 설정 때문에 하나도 충격적이지 않다.

<도그빌>에서 배우에 집중하라고 세트를 심플하게 했다는 것은 허풍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연극에서는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인 데다가, 연극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기법을 2003년에 라스 폰 트리에가 처음 개발했을 리는 없으니까. 또한 영화는 배우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배우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화면이 어지럽게 흔들려서 배우의 표정을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뒤쪽에 포커스가 맞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심플한 세트’가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은 단 몇 장면뿐인데, 가장 효과있게 쓰인 장면은 첫번째 강간장면이다. 이쯤 되면 짜증이 날 법하지 않은가? 오직 강간장면을 효과있게 하려고 전체적인 구조를 잡았다니.

<도그빌>을 관통하는 주제는 ‘오만’이다. 과연 남을 짓밟고 학대하는 것만이 오만인가? 남에게 무조건 잘 해주고 이해하는 것도 오만이 아닐까? – 라는 성찰이 그렇게 신기한가? 라스 폰 트리에의 전작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속의 댄서> 모두 줄 거 다 주고 뺏길 거 다 뺏기고 목숨까지 내놓는 ‘여자’들이 결국 구원이 어쩌구했던 것을 생각하자. 그렇게 남 학대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강변하다가 갑자기 남에게 다 해주는 것도 오만이라 주장하다니?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결국 창녀가 된 여자는 목숨까지 내놓는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도 그 고생 끝에 결국 죽어버린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도그빌>에선 창녀취급하다가 뭔가 주는 척 한다? 그것이 무슨 발전이란 말인가? 무슨 각성이란 말인가?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존재는 슬쩍 빼 놓고 남을 조종하는 재미에 중독된 것이다. <도그빌>의 첫 장면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이라는 점도 이 혐의를 강화한다. 자신의 오만함은 싹 빼놓고 남들의 오만에 대해 논하고 그것이 도덕적 깨우침이라 생각을 한다?

구약성서의 욥기가 생각난다. 신과 악마가 심심해서 욥의 믿음을 시험해보자고 자식과 재산을 다 빼앗았는데, 그래도 욥이 신을 배신하지 않자 이전보다 더 풍족하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 내가 뼈속까지 한국인이어서 그럴까? 줬다 뺐는 거 만큼이나 뺏었다가 주는 것도 못된 짓이며, 두 글자로 오만이라고 본다. 라스 폰 트리에의 신 흉내내는 행각은 정말 끝간데가 없다. 결론이나 확실하게 내리자면, 이 <도그빌>은 라스 폰 트리에가 그냥 연극을 솜씨도 어설프게 영상으로 옮긴 것뿐이며, 세 시간짜리 오만덩어리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