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은 가라, 진실은 내 손 안에 “CSI 과학수사대”

“<엑스 파일>은 이제 한 시대의 끝부분에 서 있습니다. <과학수사대 CSI>는 출발선에 서 있지요. <엑스 파일>은 ‘만일?’ 이라는 명제를 도출합니다. 비행접시가 정말 있는가? 누가 알겠어요? 모든 것이 애매모호합니다. 그러나 우리 쇼는 사실을 다룹니다. <서바이버>같은 게 아닙니다. <과학수사대 CSI>는 진짜 사실을 다루는 드라마입니다.” (윌리엄 패터슨, USA 위크엔드 인터뷰)

<과학수사대 CSI>는 확실히 새시대의 드라마다. 피도 적당히 터지고, 인물들도 적당한 수로 나오고, 연령층도 다양하고, 액션도 있는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던져주는 실마리가 어떻게 들어맞을까 생각하는 동안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나간다. 그 재미는 순전히 한 10년 정도 잊어버리고 있던 <형사 콜롬보>나 <제시카의 추리극장> 등에서 맛볼 수 있었던 퍼즐맞추기의 재미이다. 80년대 복고로 다시 돌아오는 현상? 물론 그렇게 해석해도 좋다. 그러나 모든 복고의 원칙, 이전 것을 가져와서 새로워 보이도록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과학수사대 CSI>는 추리력에 한 가지를 더 한다. 정밀한 과학적 절차. 단지 머리로 꿰어 맞추는 게 아니라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사건 현장 조사반(Crime Scene Investigation)’ 약어로 CSI. 길 그리섬이 이끄는 라스베가스 과학수사 심야수사반들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이다. 사건에 사건이 벌어지는 라스베가스. 모든 사건 해결의 기초 열쇠는 경찰도 FBI도 아니라 바로 현장을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이들이 발견해 낸 증거가 있어야만 어떤 것이 사실이며 진실인지, 범죄를 누가 저질렀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했다해서 화제를 모았지만, 사실 <과학수사대 CSI>는 역시 제작자이자 그리섬 역의 윌리엄 패터슨 그 자체이다. 윌리엄 패터슨은 제작자로서 이 드라마를,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광고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그 누가 따지고 들어도 바늘 하나 찌를 수 없이 치밀한 작품을 내놓는 것이다.

<엑스 파일>이 사람들한테 퍼즐을 확 던져버려 알아서 맞춰보라고 한다면, <과학수사대 CSI>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퍼즐을 맞춰 나갈 것인지 잘 보라는 서비스가 강하다. 치밀한 퍼즐맞추기에 모든 것을 거는 <과학수사대 CSI>의 메말라보이는 ‘하드보일드’적인 성향은 추리극의 버전업으로 보인다. <과학수사대 CSI>는 현실에 발붙이는 가장 기초적인 사안, 철저한 조사를 통해 가장 사실적이고 진실한 결론을 얻는 과정을 서스펜스로 만들어 나간다. 진실은 애매모호함이 아니다. 논란거리도 아니며,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과학수사대 CSI>를 상징하는 말은 ‘진실은 저 너머에’가 아니라 ‘진실은 우리가 밝혀낸다’이다.

그러나 현실을 다루는 <과학수사대 CSI>는 현실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현실이 아니라 저게 현실이겠거니, 하는 ‘도식’을 맞춰나간다. <과학수사대 CSI>가 2000년대 미국이라는 새 시대를 대표한다는 말은 단지 제작자의 뻥 들어간 포부만이 아니라 사실이다. 911 테러 이후로 미국은 무언가 ‘확고한 것’을 원하게 되었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던져주는 존재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확고히 해도 그 확고한 발언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독단적이며 일방적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과학수사대 CSI>도 차원적으로는 그러한 위험성을 똑같이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이렇더라,라는 도식. 과학적 검증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엑스 파일>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던가. 10년 지나다보니 다들 둔감해져서 그렇지. 철저한 조사, 과학적 추리, 정확한 증명. 이 모든 것이 사건 해결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고, <과학수사대 CSI>가 이러한 정밀성에 있어 스위스 시계를 능가하는 치밀함을 기가막히게 선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계가 애초에 존재했다는 것은 기억해둘만한 사항이다. 그 한계야말로 <과학수사대 CSI>가 정말로 2000년대를 대표할 드라마가 될지 아닐지를 결정할 것이다.

철저한 현실성을 부르짖는 <과학수사대 CSI>가 현실감을 의외로 잃어버리는 지점이 있는데, ‘이야기’가 아니라 쭉쭉빵빵한 ‘구성원’, 배우들이다. 아무리 라스베가스가 배경이라고 해도 라스베가스의 인구 90%가 모델이 아니다. 아무리 정교한 추리력을 발산해도, 제작자이며 주인공인 그리섬 빼고 보기에 좋아 보이는 배우만 선발한 것이 너무 보인다. 초기 에피소드 중(초기라서 안심하고 스포일러 발산 중), 알고봤더니 한 여자가 산악가였다 – 예상치 못하게 그 여자가 혐의자다 – 팔이 내 손목보다도 가냘프고 여리여리한 여자가 돌벽을 타는 산악가였다고? 난 뜻밖의 범인 출현에 경악하기는커녕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서비스 정신은 너무 과도하면 탈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 윌리엄 패터슨 인터뷰를 찾아주신 분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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