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어떻게 변하니? “프리텐더 제로드”

이 세상에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 그렇다면 단지 그 음모는 정부만이 저지르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개개인을 우습게 보는 거대한 힘은 정부만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모여 있는 존재라면 어디든지 가능하다.

<프리텐더 제로드(Pretender)>는 말 그대로 ‘프리텐더’, 다른 사람인 척을 하며 어디든지 잠입할 수 있는 주인공 ‘제로드’를 둘러싼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 때문에 ‘센터’라는 곳에 붙잡혀서 프리텐더로 교육을 받아온 제로드는 어른이 되자 센터를 탈출한다. 제로드를 다시 붙잡으려는 센터와 도망치는 제로드의 고양이와 쥐 게임, 그리고 제로드가 프리텐더인 자기 재능을 이용해서 어려움에 처한 평범한 사람들을 돕는 이야기. 이 두 축이 주요 플롯이다. 도망자이면서 남을 도와준다 – <도망자>와 플롯은 같지만 제로드는 킴블 박사하고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킴블 박사는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도망친다. 그러나 제로드는 거대한 자본력과 권력, 권모술수가 판치는 비밀기관에서 이용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을 치는 것이다.

<프리텐더 제로드>의 변신은 상당히 남다르다. 초능력으로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재능이나 습성같은 내면과 속을 모방함으로서 남과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의사가 필요한 자리엔 의사로 변신, 소방관이 되어야 할 때는 소방관이 되어 현장에 잠입해서 증거를 물색하는 것이다. 제로드의 무기는 떡대나 주먹이 아니라 명석한 두뇌와 철저한 모방능력이다. 이에 비해, 어릴 때부터 센터에서 같이 자란 친구로서, 커서는 수색자로서 대립하게 되는 파커는 실제 실력과 별개인 자기증명을 해야 한다는 히스테리와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은근히 서로 정을 떼지 못하는 입지에 있다. 적 혹은 동지, 친구 혹은 애인,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게 대립하는 이 둘은 센터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쫓고 쫓기는 추적에 남녀간의 긴장감까지 더 한다.

제로드는 전국을 누비며 도망다니느라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바쁠 텐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꼭 도와주려고 한다. 이 세상엔 개인이 제어할 수 없는 음모와 비리가 존재한다는 90년대의 음모론의 먹구름 속에서도 <프리텐더 제로드>는 시선을 소시민으로서 소박하게 지니는 착한 인간성에 중심을 둔다.

보통 소시민들은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다가 사고를 당하고서야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는 복잡한 절차와 규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쉬운 예로 경찰서 한 번 끌려가고 나던가 혹은 어느날 갑자기 자기 신용정보가 팔렸다는 걸 알고 나서야, 이를 대처하려면 무슨 법이 그렇게 많고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몸으로 부딪치게 된다. 당하고 나서야 자기가 이런 일에 대해 본래 알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아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것에 빠삭한 사람이 있으면 나의 억울한 처지를 금방 도와줄텐데, 하게 된다. 제로드는 이러한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과도 같은 존재이다. 의사에서 카 레이서, 심지어 제비족까지 어느 것 하나 변신 못하는 것이 없다.

제로드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넉 자로 말해 ‘역지사지(易地思之)’. 제로드는 사건을 파악한 후 잠입하여, 범죄를 저지른 자를 똑같은 상황으로 몰아넣고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는 사실 인간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인간은 내면에는 선한 면이 있고, 죄악을 저지른 자에서 당하는 자로 입장이 전도되면 악당이어도 잘못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로드는 보기보다 상당히 낙관적인 인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릴적 상처도 많고 안정된 직업도 없고 마음 둘 곳도 (당연히) 없는 떠돌이 천재이면서도 비뚤어지지 않는다. 센터에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제로드가 남을 돕는 것은 ‘자기의 부족한 면을 보상받겠다’는 심리로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제로드는 정말 진심으로 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이 보고 싶기 때문에, 인간이란 본래 선하기 때문에 남을 괴롭히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세상을 도우면서 자기 역시 모르던 세상을 배워나간다고 생각한다. 산도적(?) 같은 외모와는 전혀 딴판인 천사같은 마음씨다. 제로드 자신이 단순하고 정의롭고 세상을 편하게 대하는 것이다. 세상을 평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주인공들과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이 점을 아주 명석하게 꿰뚫은 에피소드는 다름아니라 <프로파일러(Profiler)>와 크로스오버를 한 시즌 3의 에피소드 ‘게임오버(End Game)’인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 제로드는 첫눈에 샘 워터스가 남들 못 보는 것을 보는 이상한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고, 명석한 심리분석가 샘 워터스는 사탕만 물고 사는 제로드를 보고서 즉각적으로 ‘불안정해야 하는데도 멀쩡히 남만 돕고 잘 사는’ 희한한 남자라고 꿰뚫어 본다. 하하하. 둘 다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