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어려운 용어를 쓰는 건가? – 공약정치 vs 매니페스토

특정 세계에 몸을 담다보면(예를 들어 엑스파일.. -_-) 그 바닥 용어를 쓰게 된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4-5년 전만 해도 시즌, 단독 에피소드 등의 말을 꺼내려면 먼저 5분 동안 설명을 해야 했다. 그 바닥 용어를 쓰려면 1) 그 용어를 같이 쓰는 바닥에서 하거나 2) 용어를 친절히 설명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데서 해야 한다.

http://www.manifesto.or.kr/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 본부

미안한 얘기지만 참 짜증난다. 좋은 의도는 정말로 잘 알겠는데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단지 ‘용어’ 때문이다.

내가 처음 ‘마니페스토’라는 말을 들은 것은 이탈리아 영화사의 네오 리얼리즘 말기였다. 처음에는 뭔 소린가 했더니만 이게 일종의 강령, 약조라는 뜻이다. 이전 시대의 무솔리니 군사독재 정권과 다른 영화를 추구했던 네오 리얼리즘 운동의 사람들이 그 운동을 정리하면서 자신들이 뜻한 바 = 즉 일종의 약조이자 강령을 정리하며 어떻게 나아갈 지 말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군사독재 이후 친카톨릭 정권이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폄하하고 교묘하게 탄압했기에 이에 대한 반론이었다)

정치에서 마니페스토라고 하면 정당이나 정치적 모임이 지향하는 바를 정리한 것, 공약이다. 간단하게 설명가능하다. 마니페스토보다 글자수도 적고 뜻도 명확하다. 그런데 왜 저리 어려운 용어를 쓰는 걸까?

어려운 용어 쓰면 질려버린다. 일단 즉각적으로 이해 못하고 뜻이 두 세번 거쳐야만 이해가 되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리고 잘 모르는 용어로 뭐뭐하자 그러면 훈계가 되어버린다. <엑스파일> 팬들이 자기들끼리 쓰는 용어인 DD,GA, CC, 권력협회할방구들, DDEB… 이러면 <엑스파일>을 열심히 시청하지 않거나 팬 모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따된다. 상황을 정확하고 짧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전달하는 것이냐를 무시하면 본문보다 주석이 더 많은 책을 던져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M_ 용어 설명|글닫기| 용어 설명
DD = 데이비드 두코브니
GA = 질리안 앤더슨
CC = 크리스 카터 (제작자)
권력협회 =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비밀조직을 나름 옮긴 말. 동의어로 신디케이트 등이 있다
DDEB = ‘데이비드 두코브니를 보면 에스트로겐이 치솟는 여자들 여단’의 준말_M#]

괜히 일제시대때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말을 사랑했을까? 당시 시대가 시대니 일어 쓰는 것이 더 멋져 보였을 것이고 괜히 용어 일본식으로 고쳤을 것이다. 딱 지금이 그러하다. 영어 쓰면 더 멋져 보이고 괜히 용어 영어식으로 고치고. 그러니 일본정부가 창씨개명같은 거 하지 않았을까? 조선 사람들이 알아서 일어쓰면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믿으니 별 저항 없이 이름 고치라고 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 10년 쯤 후엔 우리나라에서 ‘잉글리쉬네임’ 개명운동이 일어날 지도…)

매니페스토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저언혀… 자기들끼리 노는 거 같다. 모 탤런트가 재벌이랑 결혼해서
집안모임에 갔더니 거기 사람들이 왕따하려고 영어쓰고, 영어 배워갔더니 프랑스어로 떠들더란 괴소문이 저절로 떠오른다. 게다가 이건
이탈리아어를 영어식 발음으로 한 거… 더 짜증이다. 맨날 원어원어하면서 정작 이런 데는 원어 절대 안 쓴다.

함께 움직이자는 단체가 어려운 용어 써서 관심 없게 만든다라… 공약정치에 관심 안 가지게 호도하는 지능안티인가, 싶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으면, 사람을 움직일 자기들 자세부터 좀 봐야하고 이것은 운동의 기본이다. 쉬운 말, 쉬운 말, 어렵지 않은 말을 찾는 건 참 어렵다. 훌륭한 운동선수의 경기는 관람객도 하고 싶을 정도로 간결한 경우가 많다. 어려운 것을 쉽게 보여주도록 어렵게 노력하는 것. 자기 내부의 그 모순을 이겨내야 남도 설득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행동하는 국민을 지향하는 단체가 허풍떨고 과시조장하는 온스타일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코메디 그 자체다.

나같으면 이 홈페이지 맨 앞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기가 좋아하는 성향 골라서 가장 맞는 후보를 골라주는 설문조사를 올려놓고,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사람들 골라서 그 자리에서 같이 해 보는 이벤트를 벌일지도 모르겠다. (… 나도 참 보기보다 이벤트에 약하다)

4 Responses

  1. 오늘 대학로에서 동사무소->주민센터로 바뀐 거에 대해서 항의 서명을 받더라고. 주민센터.. 꼭 영어를 써야하는지..

  2. 필요 이상으로 외국어를 써가면서 여러 이름들을 바꾸는게 어제 오늘일이 아닌거 같아요.
    최근엔 농협도 NH 어쩌구로 바꾸고(결국 농협이니셜 앞에 따온거잖아요;;), 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려면 외국어(특히 영어, 불어, 이탈리아 어 쪽)를 쓰는 듯…

    그 느낌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말 우리말로 해석하기에 딱히 마땅한 단어가 없지 않는 이상은 되도록 우리말로 해석해서 하는게 좋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