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접은 고마운 게 아닌데

한꺼번에 여러개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난다. 1월 20일자 아침마당, 앤디님의 “생리휴가 이야기”, 닥두님의 “사라진 글”,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성장”이라는 글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남자의 성장은 인간화가 결여된 사회화 과정이고
여자의 그것은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 과정인 경향이 있다.
– 김규항

요 얘기가 가능한 바탕은 여자는 인간대접해주면 감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규항이 그렇다!는 얘기가… 맞다. 김규항씨 본인은 어떻게 주장할지는 몰라도, 저 말을 한 발언 자체가 딛고 있는 기반이 여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대접해주면 ‘고마와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자이건 여자건 공포에 따른 자기방어로서 하는 행동은 곧장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털어놓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이유를 돌리는데 선수다. 이제 남자들도 육아에 참가해야한다니까, 겁이 덜컥 나서 한다는 소리가 여자들이 이기적이라고 한다는 느낌이다.

20일자 아침 아침마당에서 그 노친네(이름도 잘 못 외우겠거니와 토론자 패널로서의 결격사유가 너무도 많아 존칭을 쓰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난지 십만년 전이다)의 말발을 보고 의자 집어던지는 방청객이 안 나온 것이 다행이다. 남자들이 집안일을 너무 안 하고 아내에게 많은 일을 지우니 문제라니까 마누라를 둘 두자고 하는 말이 농담인 줄 아는데, 그런 유기체에게 존칭 쓰고 싶지 않다. (근데 사실 남자들이 집안 일을 제대로 못하면 남편쟁이를 셋 쯤 둬야 하지 않나? 그래서 그나마 제일 집안일 잘 하는 남자 애 낳아주고)

그날 아침마당 이야기가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의 사회진출 얘기였는데, 상당히 기분나빴다. 텔레비전 안에 들어가서 그 노친네 머리통을 의자로 주성치님처럼 우아하게 날려주고 싶었다. 어째서 여성이 자기 실현을 하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하면 안 되는 건가? 그걸 이기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도대체 뭔가? 물론 이것은 약간만 비틀면 남성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 남자들은 일을 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다. 가엾은 일이다. 그런데 깨달은 것이 고작 그러니 여성도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충고니, 그 사람은 지하철 탈 일 없는게 다행이다. 누가 경로석 양보해주겠는가?

지하철 얘기로 갑자기 방향전환하자면, 지하철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 곧장 농담거리가 되는 것은 아줌마다. 어째서 아줌마들은 그런 사회성 부족의 표시가 되는 걸까? 해답은 간단하지 않을까? 사회화는 학습이다. 아줌마들은 사회와 접하지를 못하고 고립되어 산다. 오로지 가족과 그 파생된 범주에서만 살아가고 자기가 포함된 가족중심의 계량으로만 살아가게 된다. 한마디로 세계가 좁기 때문에 너른 세계에서 적응을 못하고 인식을 제대로 못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아줌마들의 사회성 부족이 문제라면 사회와 접촉을 하게끔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정작 여자들이 사회와 만나겠다는 것을 차단하는가?

다시 김규항의 글 ‘성장’으로 돌아가자면, 남자들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취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포악함을 습득하는 것이 사회에 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여자들의 성장이란 사회와 고립되어서 깨갱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그나마 받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기본 베이스를 두고서 저렇게 말해버리면 (원문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저 글만 두고 말하자면) 자긴 그러고 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파악하는 시선을 가진 자신은 멋지다는 자뻑이 되고 만다.

사회의 추악함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겁하다. 그것은 솔직한 게 아니라 방조하여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그걸 솔직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폭력행사이다. 사회의 추악함은 누구나 본다. 그것을 표현할 때 왜 그걸 선택해서 보여주는지 자기 주관하나 없으면서 무조건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다. 밀로스 포만이 그랬다. 자기가 보여주기 싫은 것을 왜 남에게 보여주냐고. 자기가 보기 싫어도 볼 수 있는 용기와 평가 및 판단할 수 있는 주관을 가졌을 때만 보여줘야하는 것이다. 그냥 툭 던져놓고 알아서 하라는 건, 정말 예수님과 요다님 빼놓고는 오만이다.

* 추신 : 아침마당의 그 노친네분 성함은 윤문식이다. 글 쓰다 생각났다. 지하철에서 만나면 절대 자리 양보 안 할 거다.

24 Responses

  1. 예수와 관련된 김규항씨의 글은 참 좋아하는데…

    이글 원문이 있었어요.
    <그 페미니즘>때처럼 될까봐
    지우고 요지만 써둔거 같은데.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참 가관이었음.
    성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입 뚝 다물고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도인이 되도 앵벌이짓 한다고 욕 안할테니
    예수 얘기 좀 더 많이 해주었으면 하네요.

  2. 핫, 트랙백 타며타며 왔는데 이제보니 워리님 블로그였군요.
    저. 그 반달 맞습니다.ㅎㅎ

  3. 트랙백 보고 구경온 사람입니다만 글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남자들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취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포악함을 습득하는 것이 사회에 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여자들의 성장이란 사회와 고립되어서 깨갱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그나마 받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첫문장은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만 뒷문장이 무슨 말인지요? 여성들이 사회와 고립되어 살아가는 건 알겠는데,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그나마 받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가서 질문드립니다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과정’이란 ‘인간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저는 ‘인간화’를, ‘타인에게 이입하는 능력, 타인과 평화적으로 교류하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람다워지는 것’으로 이해했는데요.

    “이 사회는 남성에게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타인과 경쟁하는 방법만 가르친다. 여성은 그러한 ‘사회화’에서 배제되어있다. (하지만 여성은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스스로 배우며 남성보다 훨씬 사람다워진다.)” 이것이 김규항씨의 저 글을 제 세계관에 비추어 이해한 바입니다만, 제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걸까요?

  4. 반지/ 제가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과정’은 인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하나의 단물(탄압을 수용했을 때의 보상)입니다. 여성이 타인과 경쟁하는 사회화에서 배제되어있다는 것 자체도 환상이에요. 여성이 일반 사회에 참가 못한다고 경쟁 안 하고 사나요? 아니에요. 가정이야말로 치열한 경쟁사회거든요. 누구 따라 애 낳아야 하고, 누구 따라 돈 모아야 하고, 누구 따라 집 얼마 키워야 하고… 고립되어있다 뿐이지 그 카테고리 안의 경쟁은 똑같습니다. 일정 나이에 결혼하면 저기 저 노처녀처럼 차별은 안 받는다, 일정 나이에 애를 낳아서 그것도 아들을 낳으면 누구처럼 스트레스 안 받는다, 애를 어느 학교에 보내면 그래도 남들에게 꿀리지 않는다… 바로 이게 여성으로서 인간대접 받는 것 중 하나죠.

    저는 여성이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알아서’ 배운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여성은 그래도 어떤 악조건에서도 착하게 살겠지라는 기대 자체가 하나의 환상이라고 봅니다. 마치 칭찬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결국 안 돌봐줘도 알아서 하겠지, 어떤 악조건을 줘도 착하니까 견디겠지… 하는 방어기제로서의 부인과 상황부정이에요.
    남성과 여성 모두가 악조건 안에 있는데 여성은 특히나 그 조건변수가 제한되어있어요. 마치 그것이 여성은 악조건에서 그나마 벗어난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변수로 바뀌고 말죠. 저는 현재 사교육계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봅니다. 자기들의 자아실현이 안되니까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애를 가지고 경마나 경륜 심하게 말해 투견하듯이 경쟁하잖아요.

    반달/ 어서 오세요. ^^ (_ _)

  5. http://www.voiceofpeople.org/new/2006012336301.html
    위의 기사를 읽으면서 들었던 기분이, 몸과 마음을 영화로왔던 과거에 꽁꽁 동여메 두고 권력만을 미래로 향하는, 현재에는 실존하지 못하는 괴물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남성으로서 김규항 선생의 그 글(원문)을 접할 때 들었던 기분이 그런 괴물로서의 나를 보는 것이기에 더 화가 났었지요. 김규항 선생의 원글자체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성장하지 못한 이사회의 슬픔처럼 보입니다.

  6. 혹시, 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화’란, 사회가 여성을 ‘남성의 종속물’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인간’의 지위로 승격시킨 것을 의미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거라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것 같습니다만, 김규항씨가 말한 ‘인간화’라는 것이 그걸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물론 제가 김규항씨가 아니니 실은 이것 역시 제 해석에 불과합니다만, 아무래도 여기서 ‘인간화’란, 쉬운말로 ‘사람다워지는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성은 인간화가 결핍된”이라고 했거든요. 여기에서 “인간화”를 “비인간에서 인간으로의 승격”이라고 하면 앞뒤가 안맞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인간화가 생략된”이라고 하지도 않았구요.

    네 물론 여성도 경쟁에서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말하려했던 것도 그것이 아닙니다. 남성에게는 주어지는 사회화 기회가, 여성에겐 배제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또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좀 더 인간적으로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잘 체득하고 있으며, 그것이 사회제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닌가요? 그것을 지적하는 문제의식이, 어떻게 “여성은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하니까) 배제된 채 내버려둬도 괜찮아”라는 주장으로 비약해서 이해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단,

    “남성에겐 사람다움이 결핍되어있으니 좀 더 사람다워질 필요가 있고, 여성에겐 사회화가 결핍되어있으니 사회화 기회가 주어져야한다.” 이렇게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좀 더 그럴듯 하지 않나요? 김규항씨가 사용한 ‘결핍’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주관을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7. 김규항씨의 그 글은 저도 정확히 의미 파악은 못 했습니다만, 님의 해석대로 여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대접해주면 ‘고마와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썼다고 이해하는 현상이 조금 신기하군요. 그동안 쌓아오신 피해의식이(여자분이신 듯한데) 좀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쟁이이신 듯한데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텐 예수 아니라 예수 할배라도 님이 말씀하신 그런 자격 없구요. 대안 없이 함부로 여성을 ‘폄하’했다고 흥분하시는 듯한데 그런 논리라면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김규항씨의 저 글이 그렇게 돼먹지 못한 글일까요…글쎄요…

  8. 반지/ 지금까지의 김규항씨 글을 보면 맥락상으로 그 글을 좋게 보는 게 더 어색하다고 생각해요. 김규항씨가 그동안 쓴 글은 트랙백을 통해 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1/ 지금까지의 김규항씨 글을 보면 맥락상으로 그 글을 좋게 보는 게 더 신기하다고 봅니다. 피해를 입었으니 피해의식을 가진 것은 당연하고 피해와 관련된 사안에 분출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은 이상한데요? 그리고 ‘예수님과 요다님’이라고 한 것을 보시고서도 저를 예수쟁이로 보시다니 놀랍습니다. ^^;;; 대안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유야무야하게 – 붕뜨게 만드는 시도가 문제에요. 그런 것은 문제제기 자체를 원천봉쇄하는 것이죠.

  9. 아니요, 저는 1) 님께서 ‘인간화’를 ‘인간대접해주는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고, 2) ‘결핍’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충분히 글쓴이의 주관(비판적 인식)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느냐, ‘방조’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는 건데요.

    저 짧은 글을 저처럼 굳이 좋게 해석하는거야 제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니 객관적인 설득력이 없겠지만,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님께서 저 글을 나쁘게 해석하시면서 사용하고 있는 ‘틀’이 제겐 이해가 되지 않고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는 얘깁니다.

  10. 저는 남성의 사회화와 인간화, 여성의 사회화와 인간화가 단어가 같고 사회 통념상으로는 둘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적용에서는 완전히 다르다고 봅니다. 사회통념상 남성이나 여성이나 인간화란 사람다운 면모를 살리는 것으로 적용된다면, 여성에게 적용된 인간화란 것은 겉보기엔 ‘사람답고 착하다’라는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자발적인 굴종이라는 뜻이었어요. 문맥상 문제라는 지적을 지금에서야 감을 잡았습니다 (;;;). 그 문장 안에서 결핍이라는 말을 쓴 것 자체가 여성에게 인간화라는 것이 실제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쓴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지요. 그리고 그동안의 맥락상으로 봐서 – 무시했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1. 규항넷을 살펴보다 들렀습니다. 글쎄요, 평범한 남성들의 사회화 과정은 ‘인간적 숙고나 선택’이 빠진 강제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인간화가 결여된 사회화’혹은 ‘타율적인 조직화’라고 말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성의 경우를 일반화해서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사회화, 혹은 개인화’라고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다만, 사회화 과정으로부터 여성이 ‘소외’되었느냐, ‘열외’되었느냐에 대한 생각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남성들의 경우 예컨대 군대를 가지 않은 것을 같은 남성으로써 ‘소외’라고 말하지 않고 ‘열외’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같은 관점을 여성 등 소수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죠. 또 그것이 소외냐 열외냐의 문제는 여성/남성의 구분을 넘어 계급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워리님의 문제제기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예컨대 ‘아줌마’들의 경우를 일정한 사회화라고 표현하신 부분에 있습니다. 제가 ‘아줌마’들의 관계나 생활일반을 사회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화’라고 말할 경우 그분들이 감당하고 있는 일정한 사회적 ‘소외’가 묻혀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리히의 책 ‘그림자 노동’에 보면 자본주의적 사회화, 즉 임금노동자화의 이면에는 가정-가족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소외가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매커니즘이 반복, 재생산되는 데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워리님의 말처럼 그런 ‘그림자 노동’까지 사회화라고 말한다면 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염려나 반성이 희석될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2.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압니다. 주류의 선전 캠페인이 뭔가 ‘착한 것’을 착취당하는 자의 현실을 가리려는 포장으로 사용해왔다는 건 압니다. 이를테면 지주에게 착취당하는 소작농에 따라다니는 ‘순박하다’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겠죠.

    그러나 제가 여쭙는 것은, 저 글도 그런 캠페인의 일환이라고 해석될만한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저 글에서 사용된 ‘인간화’를 현실을 가리고 포장하기 위해 동원된 말로 파악하느냐 입니다. 오히려 ‘인간화가 결여된’, ‘사회화가 결여된’이란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현실을 가리는 게 아니라 고발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요?

  13. 뮤탄트/ 저는 고립된 것도 사회화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외와 고립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적극적 참여이기도 하다는 모순이 존재하거든요.
    반지/ 지금까지 김규항씨가 여성에 관해서 쓴 글 맥락이 저의 근거가 됩니다. 여자 전체를 매도하긴 그러니까 ‘꼴페미는~’하는 전개법하고 나는 최보은이 싫어요를 하기는 그러니까 ‘일부 페미니스트는~’하는 전개법은 차이가 없어요. 여성주의 운동이 김규항씨가 살아온 근래 들어서 특히 변질된 것 처럼 유도해내는 방법으로서 90년대 페미니즘 운운한 것이지요. 어째서 여자는 자기를 위해 살면 나쁜 것인양 하는 걸까,라는 말을 제가 했는데요. 김규항씨가 정확하게 피억압자가 ‘나만의 해방’을 하는 것을 개인의 복수극이라며 폄하합니다. (일단 나만이라도 해방을 해야 다음에 뭐가 되지 않겠어요?) 페미니스트 중에 부르조아라는 쥐새끼가 있으니 니네가 알아서 솎아내지 않으면 화해같은 거 안 된다는 말은 애시당초 화해같은 거 필요없다는 말로 이해를 해야죠. 그건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잖아요. 이런 편협을 억압받는 “여성”을 이야기할 때 내세운 태도라면, 여성과 남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현실을 가리는 방편으로 사회화/인간화를 내세웠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14. 네 잘 알겠습니다. 결국 서로 다른 선입견에 따른 해석의 차이였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 선입견 대신 님의 선입견을 받아들인다 해도, 저 두 문장이 현실을 가리는 방편이 된다는 해석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과거발언이 현재발언의 이해에 토대가 되는건 당연하지만, 그것이 현재발언의 논리구조 자체를 넘어설 순 없는거니까요.

    하지만 애초에 제가 궁금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더이상 이어갈 필요는 없겠네요. 애초에 너무 김규항씨의 글이 너무 함축적어서 입장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 같구요. (바로 위의 뮤턴트님만 해도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를 ‘개인화’로 해석하고 계시니까요 ^^) 친절히 설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필하십쇼.

  15. 반지/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현재의 논리구조를 넘을 수 없다는 말씀에 지금 심장 꺼내놓고 반성중입니다. (아.. 이건 근래 엑스파일 시즌 6을 보다보니 ;;;) 좋은 지적과 충고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며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가끔은 들러주세요. 말 안되는 부분 많이 지적해주시고요. (^^) (_ _)

  16. 뭐, 예전에 한 후배가 저에게 전복적인 개인의 집합이 곧 전복적 공동체가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요. 저는 그것이 그렇게 쉽게 답할 문제는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말씀대로 현실 안에서 소수자인 여성이 전복적 개인화라는 과정을 겪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고 저도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상이 그러하다고 해서 비전까지 그래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소외와 고립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적극적 참여이기도 하다는 모순이 존재하거든요.’ 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

    저는 개인화(저는 개인화가 공공성과 같은 사회적 기능을 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관용과 다양성을 담보해준다고 믿습니다) 라는 것이 전복적 공동체에 이르려면 성원 사이에서 최소한의 엄밀한 합의와 지리한 절차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결국 이 절차와 합의라는 과정 자체가 일정한 사회적, 정치적 비전을 공유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전복적 개인’으로써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만 전복적 개인의 집합으로 페미니즘이 완성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한 인격의 올바른 완성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이미 페미니즘이 개인적 전복이 아닌 인간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면야 페미니즘 내부의 여러가지 다양한 목소리와 기준 역시 지난한 합의와 소통의 절차를 거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위에 말씀하신 ‘아줌마’에 대한 워리님의 의견에 심정적으로 현실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을 설명하신 ‘사회화’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최소’ 정의는 여러 면에서 이견의 여지가 많을 것 같습니다.

    뭐, 노동해방이 현실 운동 그룹 내에서 사회적 생물학적 성해방을 억압하거나 내지는 충돌한다고 해서 그런 틀거리나 현실 해석 전부가 틀렸고, 다시 재정의해야한다면 너무 고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줌마들의 현실이 ‘소외’된 현실이라는 뜻이 그들의 생이, 삶이 가치없고 볼품없다는 뜻이 아니듯이 남성들의 타율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화가 반드시 권력이고 헤게모니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페미니즘이 가장 섬세하고 강력하게 작동하는 부분은 바로 이 자본주의적 ‘사회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족주의적 ‘소외’를 해석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페미니즘이 이 자본주의적 사회화와 가족주의적 소외라는 근대화의 두 틀을 반성하는, 근대를 반성하는 근대로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제가 이해하고 지지하는 페미니즘은 ‘인간화가 결여된’ 남성의 사회화 과정을 타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화가 결여된’남성의 사회화와 ‘사회화가 결여된’ 여성의 인간화 모두를 반성하는 성찰적 근대의 이데올로기로써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여러가지로 생각할 꺼리를 많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종종 놀러올께요.ㅎ

  17. 뮤탄트/ 뮤탄트님 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진짜 종종 오셔야 해요. ^_^;;;

  18. 남자든 여자든 나면서부터 ‘인간화’되어 있거나 ‘사회화’되었을 순 없겠지요. 저는 오히려 저 글을 보면서 여자는 점점 바른 인간(사회성은 다소 결여된?)이 되고, 남자는 사회의 종속물로 자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만.
    무엇보다 저 글은 수사적표현으로 댓구를 맞추기 위해 다소 무리하게 단순화시킨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19. 저도 저 글을 남자는 너무 사회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그렇지 않다(못하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김규항은 마초다, 이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30대 여성이고, IF 정기 구독자인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김규항 선생이 저 글을 여자는 인간대접해주면 감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지금까지 김규항씨가 여성에 관해서 쓴 글 맥락’으로 제가 미루어 볼 때, 그렇습니다. 게다가 김규항을 아침마당(윤문식)과 엮은 것은, 누가 보아도 오바네요.

  20. 반지님의 해석이 원뜻과 가장 비슷한 것 같네요. 정worry님의 해석은 약간의 선입견과 비약이 있는 듯. ^^ 뭐 진실은 김규항씨만 아실테지만(..)

  21. 정워리님의 글은 기본적으로 독심술에 기반하고 있고, 그 논리의 주된 뼈대는 ‘우물에 독 뿌리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보이는군요. 비논리와 비약으로 가득찬 글을 아침부터 읽고나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22. 어쩌다 들려보게 되었지만 <전복적 개인>이라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말도 접해보게 되네요.

    사실 아포리즘은 논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명제라기 보다는 직관적이고 주관적으로 간명한 에스프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담론을 낳기란 쉽지 않습니다.

    문제가 된 김규항씨의 글은 비인간화되는 자본주의사회의 사회화에 덜 물든 존재로서 여성을 파악하며 이를 인간화의 관점에서 보았던 듯한데, 여성에 대한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다소 남성위주의 낭만적인 시각은 결국 여성의 적극적인 현실참여와 권리를 주장하려는 패미니스트의 견지와 해소될 수 없는 시각차를 낳게 되는 거겠죠. 서로 말하려는 뜻을 모르기 때문이라기 이전에 서로 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틀려지는 것입니다.
    김규항씨 자신이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에서 고전적인 부르주아사회의 전형적인 여성관이 투입되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부르주아는 밖에 나가서 치열하게 돈을 벌며 집에 돌아와서는 그들이 구축한 각박한 생존경쟁으로부터 벗어난 안락한 가정을 통해 루소식의 자연, <어머니와 같은 자연으로부터의 위로>라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데….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의 존재는 바로 그런 자연으로부터의 위로 자체를 나타내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된 존재인 여성 자체를.
    다른 차이가 있다면 부르주아의 그러한 여성관이 자신들의 소유욕을 충족하기 위한 여성성의 찬미라는 형식을 취한다면 김규항씨는 이를 비판적인 맥락에서 보려 한다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완전히 비판적인 맥락에서의 글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돼먹지 못했다곤 할 수 없어도 현상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담긴 글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남자인 입센이 <인형의 집>의 저자인 것과는 다른, 경계선이 모호한 차원의 글이란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화가 결여된 사회화나 사회화가 결여된 인간화나 애당초 서로 성립될 수 없는 말들일 뿐이란 점을 위의 글이 충분히 지적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회화가 결여될수록 인간화되고 인간화가 결여될수록 사회화될 수 있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지경입니다.
    아무튼 부르주아 사회를 경멸하는 김규항씨가 부르주아 사회의 전형적인 여성관으로 여성을 보며 이를 개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후자를 통해 전자가 어떻게 극복될지 어떨지를 떠나서 하나의 희극적인 아이러니라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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