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엔] 무방비 공중전화, “폰부스”

영화 <폰부스>의 설정은 매우 간단하다(그래서 상영시간도 요즘 추세에 맞지 않게 짧은 편이다). 무심결에 공중전화를 받았더니, 그 전화를 끊으면 장총으로 쏴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이미 공포영화 <스크림>에서 나온 설정이지만, <폰부스>는 그 아이디어를 뉴욕이라는 대도시 한복판으로 끌고 나와서 매우 신선하게 보이게끔 한다. 모든 것이 공개되어있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도와주기는커녕 되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여기서 얼마나 더 일이 꼬일 수 있을까?

밀폐공간은 스릴러 영화에서 종종 단골손님으로 나온다. 유령의 집에 갇힌 사람들, 고립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등등. <폰부스>의 매력은 전화박스라는, 밀폐공간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완전히 개방된, 무방비 상태일 수 있는 공간에 있다. 그런 유동적인 상황이 자칫 짝퉁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기발한 설정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릴러같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범인과 대치하지 않는다. 당하기만 하는 것이다. <폰부스>에서 주인공은 이야기 내내 공중전화 안을 떠나지 못하는데도, 이야기는 박진감이 넘친다. 보도자료에는 협박자와 심리대결을 벌인다고 했지만(히히), 심리대결은커녕 계속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주인공 스투와 자꾸 일을 꼬이게 만드는 낯선 사람들간의 밀고 당기기야말로 박진감의 근원이다. 어딘지 비어보이고 맹하게까지 보이는 콜린 파렐의 모습은 막다른 골목에서 패닉을 지나 자포자기에까지 빠지는 스투 역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이야기 전체를 색다르게 보이게 한다.

이 영화가 더 유명해진 것은 911 테러사건이나 워싱턴 ‘묻지마(도대체 누가 이런 이름을) 저격사건’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탄탄한 줄거리에 있다. 대도시의 사람들은 서로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싸움을 말려줄 이유도 없기에 한 번 시비가 붙으면 거의 죽자사자 사생결단으로 번지기도 쉽다. 익명성이 권력과 폭력을 만나면 피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예리하게 꿰뚫고 있는 각본솜씨는 천하무적이다.

감독 조엘 슈마허도 사람들 사이의 긴장에 주력한다. 인간과 폭력에 대해서 혹은 폭력적인 사회 속의 고립감까지 논하지는 않는다. 스릴러의 기본, 관객의 긴장을 하늘 끝까지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롤러코스터의 재미에 일차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폰부스>를 재미있게 봤다면, 현실이 영화를 닮는 것인지, 영화가 현실을 닮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폰부스>가 미래(워싱턴 저격사건)를 예견했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이것은 언론 선정주의가 아닌가 한다. 영화와 폭력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폭력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준에 달린 것이 아닐까? 안 그래도 <매트릭스>를 너무 열심히 봐서 매트릭스식으로 입고 총쏴서 사람 죽인 사건이 있다는데, 그런 말을 하는 범죄자나, 그런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사람이나, 다 공통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 저급해서 상상력을 즐길 자유가 없다고 말이다. 우리 인간이 매트릭스도 아니고 겨우 인간이 만들어낸 영화의 지배를 받는다니, 이건 사람을 너무 가치절하하는 게 아닌가?